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패턴이 바뀌면,
내 마음의 상태도 바뀐다.
마음이 긍정으로 바뀔 때,
나의 좋은 마음이
좋은 세상을 만들게 된다.
만족하면 행복해지고
집착하면 불행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의 만족이
내면의 결핍을 사라지게 하고,
마음의 풍요를 채운다.
마음이 풍요로워질 때, 현실은 풍족해진다. 풍요의 생각, 풍요의 말과 행위가 나를 감쌀 때, 일상은 풍족으로 이미 채워져 있다.
돈이 많아서 만족스러운 게 아니다. 마음이 만족할 때 삶은 이미 부로 물들어 있다.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내 마음이 행복하면 된다. 나의 좋은 마음이 좋은 산을 만들듯, 내 마음의 행복이 행복한 삶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을 많이 인식해야 한다.
내 주변을, 내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우리는 행복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 속에서 나는 행복하게 된다.
삶을 반짝이는 금으로 만드는 기술은 빛나는 나의 미소를 만드는 마음의 행복이다.
타인의 불행은 내 삶을 빛나게 할 수 없다. 내 주변의 행복이, 그들의 미소가 나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나도 행복하고, 그들도 행복하고, 내 삶이 풍요롭고, 풍요의 나눔으로 주변을 이롭게 하는 삶, 그것이 인생의 연금술이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에 물들어 살게 된다. 돈만 많은 외로운 ‘돈자’가 아닌, 사람이 함께하는 행복한 ‘부자’가 되는 길이다.
세상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상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세상 뜻대로 이루어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괴롭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으니 우리는 불행하다. 내 원하는 대로 남편이, 부모가, 자식이 바뀌지 않으니 늘 다툼이 일어난다.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다.
세상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 뜻대로 펼쳐진다.
세상이 세상 것임을 모를 때, 우리는 괴로워진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다. 알아차림이다. 세상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무지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냥 나는 내가 할 일을 즐겁게 하면 되고, 세상은 세상 뜻대로 그에 대한 선물을 줄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행복해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집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상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착각하지 말자.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다.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인식이다. 우리의 판단이 세상이지, 그 해석이 없으면 세상은 ‘그냥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 판단과 해석을 ‘마음의 인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식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인식이 존재를 부르며, 관찰이 물질을 만든다. 내 마음이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해, ‘그냥 그것’인 세상을 ‘이런저런’ 세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해석이고 판단이고 인식이다. 그래서 가난한 삶이란 없는 것이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난할 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그만큼 성장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은 내가 만들지만, 연은 세상이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과 계획은 내가 하지만, 결과는 세상이 만드는 이유다.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세상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고, 그만큼의 선물을 세상에 돌려주는 것. 그것이 곧 기부와 봉사, 나눔과 베풂이다.
습관이 된 나눔은 내 인생 최고의 투자가 되어 있다. 은행 잔고는 금리로 쌓이지만, 세상 잔고는 복리로 쌓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주는 선물이 많을수록 그 선물이 ‘연’의 밭을 비옥하게 만들게 된다.
노력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노력은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세상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내가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을 때,
세상은 또 다른 결과를
선물로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좋을 거라는 착각,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좋지 않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인은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씨앗이 열매를 만들지 못해도, 열매는 씨앗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인을 뿌리고, 연을 가꾸고, 과를 허용하고, 보에 집착하지 않는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인연이 결과로 드러난다.
내 마음을 가꾸고, 그 마음이 펼쳐내는 미래를 나와 정렬하는 것, 그것이 미래와 지금의 과정이 이어짐을 아는 앎이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 그 관점을 지니는 것이 미래를 살며 오늘을 보내는 방법이다.
관점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를 이끈다. 세상이 바뀔 때, 나의 관점이 바뀌는 게 아니다. 내 관점이 변하면 이미 세상은 변해 있다.
간절히 미래를 원할 때, 그것이 곧 현재에 나타날 것이라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시간의 원리를 이해할 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미래가 원인이다.
시간의 진실을 알 때, 지금의 힘든 과정을 즐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어차피 잘될 것이라는 앎’이 생길 때, 지금의 노력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펼쳐지는 인과의 대상이 아니었다. 시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시점의 인연 관계였다. (…) 현재와 미래의 인연 관계, 그것이 바로 시크릿이다.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가 즐겁다. 오늘이 달콤해야 내일도 달콤하다. 즐거움을 모르면 미래의 행복도 알 수 없다. 오늘이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하다.
삶은 여행이다.
100년의 지구별 여행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 여행 속에서
오늘을, 하루를, 과정을
채워가며 살고 있다.
열심히 대신 즐겁게,
게으름 대신 충실히
여행을 즐기면 그만이다.
삶은 스토리이고,
그 이야기가 우리의 추억이다.
열심히 대신 즐겁게, 게으르게 대신 충실히 오늘을 보내자. ‘개처럼 즐겁고 소처럼 충실한.’ 그것이 여행자의 삶이다.
‘개즐소충’하며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는 처음의 느낌으로 ‘하루’를 여행할 수 있다. 그 즐거운 여행의 과정이 행복한 미래와 이어진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지만, 여행은 즐겁고 추억은 행복한 거다.
그 여행의 추억 속에서 오늘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 이미 행복한 미래는 이어져 있다.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풍요’와 ‘감사’다. 나는 나의 내면을 이 두 단어로 채우고 있다. 나의 관념을 이 위대한 단어로 채색하고 있다.
내 무의식을 풍요로 채우고, 내면의 숲을 감사로 물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지구별 여행을 하는 시간이고, 이유이며,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내맡김은 팽개침이 아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다. 오늘을 즐겁고 충실히 보내고, 결과는 세상에 맡기는 자세다. 인생의 주인으로 오늘을 살고, 결과는 의연하게 받겠다는 허용의 자세다.
성장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나를 성장시켜준다.
내 마음을 긍정으로 채색하고, 풍요로 채우며, 감사로 물들여야 한다. 의도와 의지가 일치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 그것이 무의식의 힘이다. 창조의 근원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다.
우리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좋아하지만, 그 미래를 위한 ‘지금’은 거부한다.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늘 지금이 변하길 바라고, 내 현실이 바뀌길 원한다.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직 결과를 원한다. 현실은 지옥이고, 미래는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천국이다. 미래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미래와 연결된 지금뿐이다. 상상이 펼쳐진,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가 천국임을 알고, 지금 여기에 천국과 연결된 모든 것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오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 지금이 있어야 황금이 있다. 지금이 즐거우면 미래도 천국이다.
삶은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없다. 지금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지금을 얼마만큼 잘 보내는가’가 결국에는 삶의 모든 것이다.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고,
우리에겐 종교의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권이
종교다.
종교는 사실 진리를 깨닫는,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에 빠져서 주인의 자리를
내주지 마라.
우리 삶이 괴로운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 그 욕구를 채우고,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만족을 느끼면 우리는 바로 행복해진다.
욕구를 좇으면 풍족한 세상에 살지만 욕망을 좇으면 빈곤한 세상을 산다.
삶을 문제로 바라볼 때, 인생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지만, 상황으로 바라볼 때, 인생은 경험해 볼 여행이 되는 거다. 우리 삶이 괴로운 이유는 현실의 상황을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생은 과정을 시간으로 적분하는 삶이다. 한 방의 성공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과정을 쌓아가는, 오늘을 조정하는 즐거움이 우리 추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삶인 거다. 우리 삶은 과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쓰는 것이지 하는 게 아니다. 생각을 하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는 거고, 생각을 쓰는 것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거다. 떠오른 생각을 알아차리고, 과연 그 생각이 옳은 것인지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라는 말은 생각하며 살지 말라는 말이다. 생각을 쓰면서 살아야지, 생각하며 살면 괴롭다.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삶의 부정성도 허용할 힘을 지니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탄생했기에 소멸한다.
그래서 소멸은 탄생을 전제로 한다.
나타난 것은 무조건 사라진다.
나타나고,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고, 사라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세상만물이다.
세상이 생주이멸 할 때,
인간은 생로병사한다.
인간도 ‘사’를 통해 소멸한다.
그 소멸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누구나 슬픔을 느낀다.
그 속에는 두려움도 함께한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예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지만
나에게 괴로움은 아니다.
그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소모품이고 삶은 렌털이다.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그들의 소멸은 나의 상실이 된다. 슬픔에 상실이 더해질 때 괴로움은 나를 덮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만큼 슬퍼할 수 있다. 슬픔은 주관적이라 타인의 슬픔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저마다 슬픔은 다르다.
삶의 시간과 경험은 각자의 것이기에, 나의 슬픔과 너의 슬픔은 같지 않다. 눈물은 하나지만, 그 색채와 농도는 다르다.
내 마음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있음을 아는 앎이 있고, 그 마음에 부는 감사의 바람이 나의 말과 행동이 되어, 인생의 또 다른 감사의 경험을 내 마음에 각인시킨다. 그것이 어른의 삶이다.
깨닫고, 감사하고, 세상과 나누는 것, 그것이 어른이다.
진정한 부는 앎에서 시작한다. 어차피 잘될 거라는 이 마음의 앎, 그 앎이 생각을 일으키고, 말과 행위로 이어질 때, 이미 내 삶은 풍요로 물들고 있었다.
가난을 알기에 그 가난 속에서 부를 인식할 수 있고, 그 풍요를 마음에 채울 때 미래의 부가 나에게 다가옴을 알게 될 것이다.
가난을 알아차릴 때,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나의 내면이 결핍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때, 우리는 돈을 추구하고, 돈을 좇으며, 돈만 바라보는 삶을 벗어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마음이 가난으로 물들어서 그렇다. 늘 결핍된 생각을 하고, 결핍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런 인생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생각을 나누고, 행위를 베풀고, 감사의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운 사람의 모습이다.
삶은 우연이고 인생은 운이다. 삶은 내가 만든 운이 우연을 가장한 인연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인연 속에 살아간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을 뿌려야 하고, 물을 뿌리고, 기다리면 된다. 씨앗이 발아하는지에 집착해서 매일 흙을 파게 될 때,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열매에 대한 집착은 흙을 파게 되지만 어차피 잘될 거라는 앎은 감사의 말과 풍요의 행위라는 물을 붓게 된다.
기부와 봉사, 나눔과 베풂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건 나를 위한 행동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내 주변이 행복할 때,
그들이 행복으로 물들 때,
나는 이미 행복해져 있다.
그래서 부자는 행복하다.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행복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목표한 대로, 그것에 집착하며 그것을 위하여 사는 게 아니다. ‘지금’ 세상이 준 선물을 받으며, ‘여기서’ 내가 할 일을 충실히 할 뿐이다.
‘지금 여기’를 최선을 다해 보내고 있다. 그것이 즐겁게 사는 거고, 행복한 거고, 돈 버는 거다.
세상은 내 뜻대로, 내 목표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그것 세상을 조작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는 욕심이고, 집착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건 결국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남을 잘 되게 해주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것이다. 나의 무의식이 감사로 가득할 때, 나는 감사와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다.
감사와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내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그들이 나에게 감사를 표할 때, 내 삶은 이미 감사와 행복으로 물들어 있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아갈 때, 내 주변도 행복해진다.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는, 가족에게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내가 잘되는 것’이다. 내가 행복할 때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자식도 행복해진다. 행복한 나무가 주는 그늘의 지혜다.
나무가 잘 자랄 때, 자연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리이타의 깨달음이다.
행복은 하는 게 아니다.
행복은 되는 거다.
이미 우리에게 존재하는
행복을 인식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면,
우리는 바로 행복이 된다.
멀리 있는 행복을 찾으려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행복과
하나가 되면 그만이다.
우리 마음의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어야 한다.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어야 한다. 그때 이 마음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깨달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체득 과정에서 몸으로 느끼고 마음에 각인될 때 나타난다.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이거다. 사는 이유는 없다. 그냥 살고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났으니 그냥 살고 있다. 그러다 죽음이 찾아오면 별 이유 없이 죽는 것이다. 죽는 이유가 없듯이 사는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부여할 수 있다. 나는 그 삶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을 위해 나는 풍요를 추구하고, 감사와 함께한다. 풍요를 통해 세상에 나눔을 실천하고, 감사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why’ 없는 삶에 ‘how’의 가치를 담고 있다.
사는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지는 본인이 정하면 된다. 행복하게 살 것인지 혹은 괴롭고 불행하게 살 것인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존재가 이유를 선행한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에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손은 있으니까 있는 것처럼, 삶은 생존하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인연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다하게 된다. 그러니 사는 이유를 찾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고민해 보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경험이고, 경험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살아있다는 단순한 기적과
볼 수 있다는 황홀한 축복,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에 감사하며
세상을 바라보자.
행복으로 물든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삶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다. 삶은 스토리로 남고, 인생은 그 이야기들이 쌓인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은 마음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고, 해석하고, 나의 언어로 기록한 생각의 이야기. 그것이 곧 나의 삶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앎이 인생의 추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앎’이 곧 ‘삶’인 것이다.
가난한 삶은 없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난할 뿐이다. 괴로운 삶은 없다. 삶을 괴롭게 분별하기에 그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삶이 한 편의 영화임을 알 때, 우리는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우리가 그 영화의 감독이고, 그 영화의 비평가이며, 그 영화의 관객이다.
세상은 사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텅 빈 스크린은 영화에 물들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만든 영화가 그 위에 방영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살지 말자.
가볍고 즐겁게 살자. 즐겁게 영화를 보고 가볍게 꿈을 꾸자. 그것이 우리 삶이고,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꿈이다.